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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당 김태규님 전언

운명의 수레바퀴, Rota Fortunae

운명의 수레바퀴, Rota Fortunae    2014.4.7

운텀 라아트(Unterm Rat), 수레바퀴 밑에서, 이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제목이다.

(헤르만 헤세, 젊은 시절 한 때 이 양반의 소설과 시는 얼마나 많은 위안을 내게 주었던지 그 이름만으로도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이젠 아련히 먼 저편으로 흘러가버린 고뇌하던 나의 청춘의 시절이여!)

라아트(rat)는 수레바퀴를 뜻하는 독일어인데, 여기서 수레바퀴란 바로 ‘운명의 수레바퀴’를 뜻한다.

머리가 좋았던 죄로 부모와 선생님의 압력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시계부품공장의 견습공이 되었으나, 그 또한 주변의 냉대로 힘들어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귀가하다가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물에 빠져 죽는 내용이다.  

“지치면 안 돼, 수레바퀴 밑에 깔릴 지도 모르니까!”, 이 문구는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영국문학의 아버지로 유명한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속에도 운명의 수레바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세익스피어의 비극, ‘to be or not to be’란 대사로 너무나도 유명한 ‘햄릿’에서도 ‘운명의 바퀴살을 부수어야 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무수한 古典(고전)과 문학 속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는 정말이지 무수히 언급되고 다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운명의 수레바퀴’란 개념 또는 관념은 서양 문화 저 깊은 바닥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기원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이다. (행운을 뜻하는 포춘, fortune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녀는 ‘운명의 수레바퀴’, 즉 Rota Fortunae 를 관장하면서 영원히 돌리고 있다 한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네 개의 단계로 이루어져있는데, 바퀴가 부단히 굴러가면서 사람 또한 끊임없이 다음 단계로 輾轉(전전)하게 된다 한다.

12 세기 경 작성된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란 책에는 그 수레바퀴의 삽화가 들어가 있다. 그림 자체가 워낙 직관적이라 별도의 해설을 필요치 않다.

그림을 보면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수레바퀴 한 가운데에 여신 포르투나가 자리하고 있다.

바퀴 바깥에는 네 명의 사람이 묘사되어 있다.

주변바퀴의 왼쪽에는 사람이 힘차게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바퀴의 맨 위에는 어렵게 바퀴를 올라온 사람이 영광스런 冠(관)을 쓰고 권위의 상징인 지팡이를 든 채 權座(권좌)에 앉아있다.

바퀴의 오른 쪽에는 사람이 거꾸로 떨어지면서 머리에 썼던 冠(관)도 머리에서 벗어나 밑으로 추락하고 있다. 다시 바퀴의 맨 밑에는 바퀴에 깔린 사람이 위를 보고 누워서 신음하고 있다.

(성의 있는 독자라면 영문 위키피디아에 가서 ‘carmina burana’를 한 번 검색해보시길 바란다.)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바퀴의 네 곳에 자리한 사람의 모습은 바로 나 호호당이 무수히 말하고 있는 운명의 四季節(사계절)이다.  

바퀴를 힘차게 기어오르는 왼쪽 사람은 여름을 지나고 있고, 맨 위 권좌에 앉은 이는 가을을 지나고 있다. 바퀴 오른 쪽에 추락하는 사람은 겨울을 지나고 있고, 맨 아래 신음하는 이는 운명의 봄을 보내고 있다.

서양에서 제시하고 있는 운명의 수레바퀴에는 바퀴살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바퀴살은 모두 24 개로서 바로 ‘운명의 24 節氣(절기)’이다.

사실 나는 로마 신화의 여신 ‘포르투나’가 돌리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대해 대충은 들었으나 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내가 알아낸 운명의 법칙인 四季節(사계절)과 24절기를 통한 循環論(순환론)이 그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운명의 수레바퀴가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느껴오고 있었다. 다만 그 實在(실재)에 대해 막연한 관념이었을 뿐 확신하진 못했던 것 같다.  

나 호호당은 그런데 운명의 수레바퀴가 實在(실재)한다는 것을 최초로 명확하게 입증해내었다. 나아가서 그 수레바퀴의 운동법칙과 규율을 數理(수리)적으로 정밀하게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최초일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이 말은 결코 과대망상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알아낸 사람이 어떻게 나 자신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지금까지도 당황스럽고 황당해할 때가 많다.

내가 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법칙화하여 정밀한 이론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접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까닭이라 본다.

거기에 더하여 인터넷이 등장하고 ‘위키피디아’가 나오면서 나로 하여금 무수히 싫증이 날 정도의 檢證(검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한국판 위키피디아는 사실 내용이 부실하지만, 영문 위키피디아는 정말이지 역사상 무수한 사건과 사람의 일에 대하여 풍부하고도 상세한 정보로 넘쳐나는 ‘거대한 정보의 大洋(대양)’과도 같다.

동서양 고전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 인터넷과 위키피디아라는 도구가 등장하면서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 정체를 드러내게 내었다.

그 운명의 수레바퀴란 과연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떤 식으로 규율되고 있는지, 또 그 속에 담긴 深遠(심원)한 含意(함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21 세기 초의 10 년이란 세월 속에서 아직은 역사의 변방인 대한민국의 어느 귀퉁이에 살고 있는 한 보잘 것 없는 사람에 의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내가 명리학 책을 처음 접한 것은 1971 년이었다. 열일곱의 나이였다. 그 이후 운명에 관한 책이란 책은 샅샅이 읽어보았으나 미진함을 느꼈고, 결국 나름 어떤 발상을 하게 된 것이 1982 년이었다.

내 발상을 깊게 연구해보기 위해 A.D. 3세기 경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남긴 ‘알마게스트’라는 상당히 난해한 책을 입수해서 읽게 되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러다가 다시 1995 년, 마침내 좋은 假說(가설)을 하나 세우게 되었고, 그 가설을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달이면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가도 가도 迷路(미로)를 방황할 뿐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2007 년 지친 나머지 결국 法則化(법칙화)시킬 수 없다고 포기했던 순간, 그로부터 겨우 한 달 만에 결정적인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2007 년은 내가 처음 명리학이란 것을 접한 1971 년으로부터 36 년이 흐른 시점이었고, 그로서 운명의 수레바퀴는 자신의 정체를 내게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역시 운명의 법칙에 정확하게 대응이 된다.)

그 이후 운명의 수레바퀴가 지닌 세부적인 국면에 대해 연구해왔고, 이 또한 6년이 흐른 2013 년이 되자 全貌(전모)와 細部(세부)에 대해 많은 것을 규칙화시키고 이론화시킨 나머지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을 확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하나의 문제가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을 책으로 써서 밝히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하는 갈등이다.

대충 그럴 것 같다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명확하게 운명의 이치, 수레바퀴의 이치와 법칙에 대해 알게 된 결과 이것이 그대로 보편적으로 알려지고 퍼지면 과연 그것이 사람들에게 유익하기만 할까 싶은 것이다.

가령 여기에 새롭게 출생한 아기가 있다고 하자.

그림책으로 보는 唐四柱(당사주)라든가 아니면 대충 용하다는 역술가를 찾아가서 인생이 참 복스럽고 행복할 것이라는 德談(덕담)을 듣고 오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 신생한 아기가 지니고 태어난 운명의 수레바퀴에 대해 미리 알아버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하는 얘기이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네 개의 국면,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로 이루어진다. 그 속에 苦難(고난)과 辛苦(신고)의 세월이 있으며 당연히 영광과 도취의 세월도 있는 것인데 오로지 좋은 것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에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정말로 운명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한다면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하려면 그 또한 한 道(도) 깨치는 수준이라 하겠으니 대략 난감하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그렇다고 책을 써서 비밀리에 자격이 되는 사람에게만 전하는 방식을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이는 마치 무협소설과도 같아서 대략 유치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아직 갈등과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마음을 확실하게 정하지는 못하고 있는 나 호호당이다. 아마도 1971 년으로부터 48 년이 흐른 2019 년이 되면 결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사실 이 블로그 자체가 그런 갈등의 산물이고 타협이다.

다 밝히자니 두렵고, 그렇다고 그냥 지내자니 알려주고픈 것이 너무 많아서 내용을 희석해서 쓰고 있는 글이 바로 이 호호당 블로그이다.

작년부터 상담을 재개했다. 하지만 찾아오신 분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대단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색해서가 아니라 운명의 이치와 그 수레바퀴에 대해 저 무수하고도 심원한 내용들을 짧은 시간 안에 충분히 납득이 가도록 알려드릴 수야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담은 實戰(실전)적이다. 찾아온 이에게 정해진 시간 안에 가장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인상에 남길 수 있도록 자문을 해준다. 이해할 수도 없는 많은 말을 해준 들 결국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까닭이다.

(사실 어느 정도 제대로 납득하고자 한다면 결국 내가 진행하고 있는 강좌를 듣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 부단히 독자들에게 해주고 있는 이야기 역시 바로 이 운명의 수레바퀴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수레바퀴가 가지고 있는 보다 深遠(심원)한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충분히 이야기해주질 못했다. 어쩌면 그것을 글로선 전달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운명의 사계절과 24 절기에 대해선 제법 많은 얘기를 했지만, 그것들이 왜 그렇게 돌아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겪게 만드는 것인지 그 의미에 대해선 특히 충분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호호당의 이 블로그에는 앞으로도 여전히 많은 글이 올라올 것이다.

창밖에 목련꽃 다 지고 새잎사귀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저 햇빛이야말로 운명의 창출자가 아니겠는가!

(대문에 물오르는 실버들 사진을 올렸다, 여린 잎사귀에 색깔마저 연하고 여리니 좀 보시라고 올렸다.)

[출처]<a href='http://www.hohodang.com/?bbs/view.php?id=free_style&amp;no=1174' target='_blank'>호호당 블로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