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호당 김태규님 전언

丑月(축월)의 땅, 그리고 행복의 비밀


丑月(축월)의 땅, 그리고 행복의 비밀    2012.1.27

지난 21일 大寒(대한)으로부터 이제 엿새가 지나고 있다. 한해를 통틀어 가장 추운 이맘때다.

12월의 冬至(동지)로부터 해는 다시 길어지기 시작했으나 땅은 동지로부터 한 달이 지난 大寒(대한)에 이르러 가장 차갑다.

天氣(천기)는 이미 動(동)했으나 地氣(지기)는 여전히 감감하여 아무런 소식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대한으로서 땅의 기운도 저 밑바닥에서는 이미 시동을 걸었지만 그걸 누가 알겠는가!)

‘認識(인식)의 地平線(지평선)’이란 것이 있다.

갑자기 이상한 말 꺼낸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 들어보면 쉬운 말이다.

어떤 일이 생겨났어도 처음에는 워낙 미미하여 사람의 눈에 들지 않는다. 이런 경우를 인식의 지형선 ‘밑’에 있다고 하겠고, 생겨난 어떤 일이 한창 진행해서 이윽고 보는 이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를 두고 사건이 인식의 지평선 ‘위’로 나타났다는 표현을 쓴다.

인식의 지평선이란 이런 의미의 말이다. 모든 일은 처음 발생 시에는 워낙 가물하고 미미하여 미처 알아보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이런 개념을 쓴다.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자신의 책에서 ‘이벤트 호라이즌’, event horizon 이란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와 유사한 말이다.

이제 丑月(축월)의 땅을 바라보자.

무더운 여름의 산야를 뒤덮었던 그 무성한 것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푸르고 넓었던 나무 잎사귀들, 그 많았던 벌레들, 명랑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던 개울물, 햇빛을 받으며 쭉쭉 벋어가던 벼와 풀들, 그 무성했던 생명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丑月(축월)의 땅이야말로 그냥 無(무)의 공간이고 ‘없음’의 공간이다. 땅과 하늘과 바위야 그대로 있고 나무들도 있지만 그건 벗은 나무에 불과하다.

‘없음의 공간’에서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생명의 없음’이고 생명활동의 不在(부재)이다. 그렇기에 축월의 땅을 두고 ‘죽음의 땅’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구상의 에너지원은 궁극적으로 햇빛이다. (땅 저 깊은 곳에는 지열이 있지만 사실 그건 우리를 포함한 생명체들과는 별 상관이 없다.)

햇빛이 바로 天氣(천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地氣(지기)란 무엇일까?

地氣(지기), 땅의 기운이란 햇빛을 받아 땅이 데워지면서 생겨난 地熱(지열)을 말한다. 천기는 빛, 光(광)이고 지기는 熱(열)인 것이다.

생명은 天氣(천기)와 地氣(지기)를 바탕으로 움이 트고 싹이 튼다. 풀이나 나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인간이라는 고등생명체도 궁극적으로는 그로부터 생겨나고 성장한다.

천기와 지기의 기운 덕으로 생겨나는 초목과 곡물로부터 모든 동물들이 생명의 에너지를 얻으니 그렇다.

햇빛을 받아 데워지는 땅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바탕인 것이다.

그러니 축월의 땅은 작년의 모든 것은 이미 끝이 난 상태, 그리고 이제 새해로서 새로운 생명활동을 준비하는 때인 것이다.

준비한다고 했지만 앞서 말한 ‘인식의 지평선’이란 개념에서 보면 아직 그 무엇도 준비하거나 시작하지 않고 있다.

천기가 관대함을 베풀어 땅으로 더 내려와야 할 참이고 地氣(지기)는 이제 막 始動(시동)을 걸고 있으니, 우리 눈에 모든 것은 그저 쉬고 있는 것으로만 보인다. 축월의 땅은 그 어디에도 生意(생의)나 生氣(생기)는 보이지 않으니 우리 눈에는 그저 쉬고 있을 뿐이다. 休止(휴지)의 때인 것이다.

하지만 천지와 자연은 엄밀히 말하면 쉬는 때가 없다, 間斷(간단)없이 움직여가는 하늘과 땅이고 저 대자연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저 休止(휴지)의 시간들도 실은 그렇다.

丑月(축월)의 자연이 쉬는 것처럼 보일 뿐 실은 쉬지 않듯이 우리도 그렇다.

그러니 축월에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한다.  

축월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고,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런저런 막연한 想念(상념)에 젖어보는 것이 축월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흔히 양력 1월 초를 맞아 사람들은 이런저런 결심을 하는데 사실 부질없는 일이기 쉽다.

축월의 생각은 막연한 구상이거나 생각, 잡념들인 것이 더 정상이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가령 담배를 끊겠다는 생각도 막연한 생각이기 쉬워서 조금 지나면 금방 흐지부지 끝이 난다. 그러니 나는 축월의 때에 어떤 결심을 하지 말라고까지 얘기해준다.

축월의 때는 막연한 생각들이나 그간 바빠서 미처 충분히 헤아려보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젖어보는 기간들이다.

우리의 內面(내면) 깊은 곳으로 한 번 沈潛(침잠)해보기에 가장 좋은 때가 축월의 시간들인 것이다.

축월의 땅 역시 우리와 같다. 뭔가 움직이긴 한다. 하지만 구체적이지 않다. 축월의 땅 역시 想念(상념)에 잠겨있다.

어디에도 뜨거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으니 당장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사실 없다. 급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뜨거워진 연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구상해보아도 좋고 지난 일들을 반추해보아도 좋으며 아니면 전혀 엉뚱한 생각에 빠져 몽롱한 시간들로 채워도 좋을 것이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지극히 모호하여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꿈속인지 아니면 현실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작년의 일은 이미 마무리되어 끝이 났고 새해의 일은 아직 태동의 단계에 있으니 축월은 죽음과 삶의 경계 사이에 위치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여러 독자들에게 들려드리고 있는 많은 얘기들, 음양오행과 운명, 60 년의 주기 등등 많은 것들이 돌이켜보면 내 운명의 丑月(축월) 기간 동안, 그러니까 1994 년에서 1997 년 초에 이르는 30 개월의 시간 동안에 胎動(태동)된 것들이다.  

내가 운명의 60 년 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막연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1994 년으로부터 10 년이 지난 2004 년 무렵이었고 그것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12 년이 지난 2006 년 무렵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전체 이론에 대한 마무리를 마친 것은 2009 년 초였으니 이 또한 1997 년으로부터 12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블로그는 바로 그 2009 년에 시작되었다! )

그러니 그간의 모든 새로운 깨달음들과 精練(정련)들은 그 淵源(연원)이 따라서 1994년 가을부터 1997 년 초에 이르는 기간들, 즉 60 년을 하나의 주기로 하는 내 운명의 丑月(축월) 기간 동안에 태동된 것들이다.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축월에 몽상과 상념을 통해 태동된 것들이 인식의  지평선 위로 올라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들이 걸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2004 년은 내 운명에 있어 春分(춘분) 무렵이었다. 춘분이란 낮이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 그러니까 인식의 지평선 위로 그 무엇들이 떠오르는 때라 하겠으니 그것은 사실 내 운명의 축월인 1994 년으로부터 10 년 뒤의 일이었다.

양력 1월 丑月(축월)의 大寒(대한)에서부터 양력 3월 卯月(묘월)의 春分(춘분)까지는 60 일이다. 그리고 60 년을 하나의 주기로 할 때 그 시간은 10 년이다.

그러니 생각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은 짧게는 60 일, 길게는 10 년이 지나야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법이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360 년을 하나의 주기로 하는 경우 60 년은 지나야 구체화된다!)

금년에 일어날 모든 일들 역시 아직은 구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미 생겨나고 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금년 총선과 대선이 있어 모두 관심이 많겠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막연해서 그 누구도 결과를 모른다. 하지만 양력 3월의 춘분이 되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해서 양력 4월 20 일경의 곡우 무렵이 되면 거의 확정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궁금증 역시 그저 막연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여론조사를 하고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율을 발표하고 있지만 그저 조사는 조사일 뿐이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내가 권하는 것은 간단하다.

축월의 땅을 직접 밖으로 나가 밟아가며 이런저런 상념 또는 몽상에 잠겨보라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축월을 가장 알차게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집과 사무실만 쳇바퀴 도는 사람이라면 사실 축월의 땅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바라볼 시간도 없었을 터, 오늘 이 글을 읽은 후 시간을 내어 축월의 땅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바라볼 시간을 한 번 가져보시기를 바란다.

축월의 땅을 마음 다져먹고 한 번 유심히 바라보기를 권했는데, 이 말은 눈으로만 보라는 말이 아니다.

들에 나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축월의 꽁꽁 언 땅을 밟아가며 거닐어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온 몸으로 축월의 땅을 느껴보라는 뜻이다.

잿빛 구름 사이로 비치는 여린 겨울 햇살이 어떤지, 눈에 덮인 겨울 벌판의 얼음 밟는 소리를 귀로 듣고 발로 느껴가며 느껴보라는 말이며 또 그 어디에도 생겨나고 뻗어가는 것이 없는 그 적막한 풍광을 몸속 깊이 받아들여보라는 말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축월의 땅이 어떤 것인지 조금 알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행복의 비밀’에 대해 알려드리겠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그러니 행복의 비밀을 공개한다는 것은 사실 대단하고도 엄청난 서비스가 아닐 수 없다.

행복의 열쇠는 돈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며 명예에 있지도 않다. 그런 것은 가져보지 못한 자들이 갖는 妄想(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할 수 있는 것의 비밀은 ‘주변의 것들과 얼마나 共感(공감)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새로운 연애에 빠져든 연인들은 마냥 행복해한다. 이유는 새로운 연인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 연인과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로서 우리의 모든 공감능력이 활짝 열리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연애를 할 순 없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것들과 늘 공감할 수 있다면 당신은 늘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축월의 땅을 밟으며 당신이 축월의 땅과 공감을 나눌 수 있다면 당신은 축월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축월의 땅으로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앞에서처럼 눈으로만 보지 말고 온몸을 다해 축월의 땅을 느껴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봄바람도 좋지만 냉랭하고 쌀쌀맞은 축월의 대지 위를 불어오는 바람과도 우리는 원래 공감을 나눌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존재인 것이다.

돈이나 명예, 지위, 권력이 행복의 열쇠인양 여기는 까닭에 세상은 온통 시끄럽다. 동기는 물론 행복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틀렸다.

원래 그 무엇과도 공감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생명이고 우리들인 것인데 앞서의 그런 헛된 착각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불행하게 살아간다.

내 눈에 사람들은 그저 불행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나’는 행복해야 한다면서 다른 것과 공감하기 보다는 그 ‘나’에게만 집착하는 바람에 그 ‘나’를 억지로라도 불행하게 만들어가고 있으니 그게 참 답답한 노릇이다.

행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잠시 그 행복해야 할 ‘나’를 뒤에 놓고 우선 주변의 모든 것들, 그 어떤 것도 좋으니 그것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보라.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생명체 그리고 나아가서 부는 바람이나 적시는 비, 유유히 흘러가는 강과 같은 무생물들과도 우리는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는 능력과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당신은 비로소 무한 행복의 열쇠를 손에 든 셈이다.

내 말이 장난같이 들린다면 쯧쯧 안 된 마음이다, 하지만 내 말을 기억해두시기를 바란다. 언젠가 문득 우연히 지금의 이말이 당신의 가슴 속 깊은 곳, 진정으로 행복하기 바라는 ‘내면의 당신’이 ‘거죽의 당신’을 밀치고 고개를 내밀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자 이제 축월의 땅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나가보시기를 바란다.

 

[출처]<a href='http://www.hohodang.com/?bbs/view.php?id=free_style&amp;no=742' target='_blank'>호호당 블로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