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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당 김태규님 전언

젊음이 한밑천

비취빛 5월에 1000 개의 글을 自祝(자축)하면서    2013.5.10

얼마 전 프리스타일 글의 일련번호가 990 번에 이르렀을 때 ‘야, 이제 1000 이란 숫자가 곧 달리겠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잊고 있었는데 어제 저녁 메일로 한 독자 분께서 1000 회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을 보고서야 아, 그랬나? 했다.

지난 5년 동안 1000 개의 글이면 평균 200 자 원고지 매수로 25 매 정도이니 2만 5천매 분량이다. 책으로 만들면 12 권은 족히 나온다. 참 많이도 썼구나 싶기도 하고 장차 써나갈 것을 생각하면 그 일부에 불과하기도 하다.

어떤 날은 딱히 쓸 내용이 없다 싶지만, 또 어떤 날은 하고픈 말들이 여전히 많다는 생각을 한다. 글쓰기는 어느새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진과 그림 또한 생활의 빠질 수 없는 일부인 것과 같다.

아마추어 화가 혹은 사진가, 이게 참 재미있는 일이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지 않기에 마음 내키는 대로, 느끼는 대로 찍고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말이다.

비 그친 아침나절 작업실로 나오는 택시 안에서 비에 젖은 나무들이 연신 눈에 들어왔다. 몸통은 젖어서 까맣게 보이는데 신록은 더 새침하고 사랑스럽다. 그 對照(대조)가 한정 없이 아름답게만 전해져왔다.

翡翠(비취)의 녹색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5월의 세상은 그저 온통 비취빛이니 나는 보석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겨울이 길었던 탓인지 이번 5월은 더 없이 신선하다. 흐리면 흐린 대로 햇빛 쨍 하면 쨍한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으며, 바람 불면 그 바람 또한 좋으니 모두 다 좋다.

죽음을 잊지 말라, memento mori, 모든 종교적 가르침의 바탕에는 늘 이 말이 놓여있다. 종교는 어떤 면에서 이 생각이 전부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라는 것인데, 5월만큼은 흔쾌히 예외로 치부하겠다.

지금 나는 살아있고 또 살고 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내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 더욱 이 순간들이 좋다.

삶을 충분히 즐기고 진저리칠 정도로 맘껏 즐겨서 어느 날 마지막 순간이 오면 그간 정말 즐거웠으니 더 이상 미련 없다는 말을 뱉으면서 선선히 삶의 무대에서 퇴장할 수 있기 위해선 내 줄기차게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을 즐기려 한다.

사실 이게 나 호호당이 가진 목적의 전부이다.

때가 되어 삶을 내려놓을 때, ‘그래 난 진짜 마니 무따 아이가!’ 하는 말을 내 스스로에게 해줄 생각이다.

생각해보면 어려서 읽은 위인전 같은 내용의 책들이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점도 많다는 생각을 한다.

삶의 목적이란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이다.

그런 책을 많이 읽으면 다소간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훌륭한 사람이란 것이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애매하다는 사실이다.

세상 한 바탕 요란 뻑적지근하게 희젓고 가면 그게 훌륭한 사람인 것인지, 돈이 많으면 훌륭한 사람인지, 권력이 많으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종교적 지도자가 되어야 그런 것인지 그게 참 판단하기가 그렇다.

대충 생각에 씨알 굵게 살다 가면 위인이라 쳐주는 것은 같은데, 사실 그 주변 사람들은 그 바람에 얼마나 성가시고 피곤했으랴 생각하면 별로 좋은 일도 아니다.

또 위인의 반열에 들었다고 치자, 그래본들 죽으면 뭔 소용이 있나 싶은 것이다. 천하 부자 정주영도 죽은 지 오래 되었고 어제 뉴스에서 보니 이번 박대통령의 미국 순방길에 동참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몸이 많이 힘드신지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있었다.

내가 평소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이란 말이다. (그 바람에 들국화의 그 양반 마약 좀 했고 머리카락도 무척 지저분하지만, 나는 기꺼이 용서해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젊은이 본인들은 어째서 새파란 젊음이 한 밑천이 될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걸 제대로 알면 이미 젊은이가 아니더라는 얘기, 정말 재미가 있다, 크크킄!)

사실 젊음 그 자체는 가치가 진짜 없다, 시장에서 전혀 가격을 쳐주지 않는다. 그 바람에 어벙한 젊은이들은 새파란 젊음의 가치를 전혀 모른다.

이에 마음 滑手(활수)한 나 호호당이 그 비밀을 공개하고자 한다.

여기 하얀 도화지가 잔뜩 뭉텅이로 쌓여 있다고 하자. 뭉텅이 도화지라 해봐야 그거 충무로 인쇄골목에 들고 가면 몇 푼 쳐주지도 않는다. 어쩌면 근으로 달아서 가격을 매길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새파란 젊음의 가치인 것이다.

그런데 그 도화지에 이렇게 그려보고 또 저렇게 그려본다. 종이야 많으니 계속 그리고 또 휘리릭 뭉개버릴 수도 있다. 구겨봤자 종이 한 장이니 그렇다.

그런데 계속 그리다 보니 어쩌다가 세상에 다시 없는 걸작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호의 그림처럼 말이다.

빈센트 그 양반은 심약해서 그만 자살하고 말았는데, 그게 성미가 급한 탓이었다. 좀 더 개기고 눙치면서 시간을 보냈다면 좋은 세월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새파란 젊음은 그 자체로서 별 가치가 없지만, 걸작이 나올 가능성이 바로 한 밑천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희박한 가능성 같은 소리 말고 바로 현금 혹은 캐시가 있다면 더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현금이 많으려면 그간 세월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간단히 말하면 늙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생각해보라, 돈이 많고 성공했다 해도 이미 그 사이에 늙었으면 상실도 엄청 크다는 사실을.

물론 부자 아버지를 둔 바람에 젊었지만 돈마저 많은 사람도 있긴 하다. 하지만 확률이 별로 없는 것이고, 동시에 또 한 가지 비밀스런 사실로서 ‘세상의 돈이란 지킬 능력이 없는 자에게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러니 젊고 돈 많은 것은 사실 별 것도 아니기에 다시 돌아와서 얘기한다.

나 호호당도 마흔 초반까지는 라면 두 개에 식은 밥 잔뜩 말아서 순식간에 먹어치우던 사람이다. 이른바 ‘폭풍 흡입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게 뭘 말하는지 젊은이들은 모를 것이다.

바로 엄청난 체력이고 지치지 않는 열정이다. 지금도 열정은 그다지 식어들지 않았지만 역시 체력은 그게 아닌 것이다. 마음과 몸이 따로 논다는 사실이 얼마나 상실감을 주는지 젊은이들은 모를 것이다.

먹는 양이야말로 그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의 양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그게 소중한 것인 줄 잘 모른다. 건강과 체력은 늘 주어져있는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진 자는 자기의 그 ‘가짐’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 호호당은 이제 알고 있다, 내년이면 예순이지만 그렇다고 별로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여든 된 분이 나를 보면 야, 좋은 때다 좋은 때야 하며 얼마나 부러워하겠는가 말이다.

젊은이가 가진 그런 젊음이야 내게 이미 없지만, 젊음이란 것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고 게다가 여든 나신 분에 비하면 당연히 많은 젊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야말로 두 손에 떡을 든 셈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 호호당은 인생이란 게임에 있어 노련한 맛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론 여전히 참신한 면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자네들도 역시 엄청 부자라는 점을 일러주기 위함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또 내 자랑만 늘어놓고 있다. 용서 바란다.)

잠깐 이 대목에서 정리하면 젊은이들이여, 가진 도화지를 시장에 가서 斤(근)으로 내다파는 우를 범하지 말고, 열심히 그 도화지 위에다가 뭐라도 그려보라는 것이다. 좀 더 주문한다면 ‘까짓 거 안 팔리면 말고’ 하는 배짱까지 곁들인다면 그거 진짜 돈 되는 날이 온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울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세상이 알아먹을 때까지 우기는 배짱과 기개가 중요하다. (젊은이는 우격다짐을 부려도 용서 받는다는 사실도 참고로 알아두시길.)

사람은 태어난 이상 잘 살아야 하겠고, 잘 살려면 현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명함을 얻으려면 그 이전에 서툰 짓을 좀 해볼 필요가 있다. 시행착오 말이다. 시행착오 없이 현명해지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사실 별로 현명해지지도 않는다.

요즘 멘토 운운 하면서 자기의 어드바이스를 잘 들으면 현명해질 수도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데 그게 내 보기엔 별로 그렇지가 않다.

인생이란 사실 스스로가 자신의 멘토가 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알기 위해선 이 산도 기웃거려보고 저 산도 기웃거려 보는 수밖에 없으니 그냥 두고 볼 뿐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는 53 명의 善知識(선지식)을 찾아다닌다. 그것이 결코 경문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다.

선재동자에서 善材(선재)는 착한 재주가 아니라 ‘뛰어난’ 재주를 말한다. 근기가 뛰어난 어린 童子(동자)인 것이니 ‘새파랗게 젊다는 것’, 망쳐도 되는 도화지가 잔뜩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入法界品(입법계품)에 등장하는 그 53 명의 선지식을 가진 고수들은 어떤 면에서 사기꾼 혹은 엉터리 멘토들일 수도 있다. 이에 동자는 사기를 늘 당하고 다니지만 결국 그 시행착오를 거쳤기에 참다운 삶의 진리인 法界(법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화염경의 저 장엄하고도 감동적인 입법계품의 이야기는 바로 가진 것은 없고 그저 새파랗게 젊다는 것이 한 밑천인 젊은이들의 ‘레알’ 스토리인 것이다.

이에 또 한 사람의 엉터리 선지식이라 자처하는 나 호호당이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린다.

성과 혹은 결과를 도중의 과정과 분리해서 생각하시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결과는 과정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후의 성과만 따질 일이 아니요, 중간의 과정만 중시해서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숱한 시행착오와 어리석음을 통해 꽃은 피어난다.

프리스타일에 1000 개의 글을 올렸다, 自祝(자축)함과 동시에 이 역시 이어지는 과정임을 확인한다.  

(대문과 오픈 다이어리에 올린 사진, 늦은 밤 비오는 산책로에 번들거리는 불빛과 무성한 잎사귀들, 아들 녀석은 어버이날에 아무 것도 챙겨주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잘 놀아주니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야, 우산 좀 잘 받쳐봐, 아니 지금 받치고 있잖아요, 옥신각신 이런 말이 오가는 인적 없는 山中(산중)이고 雨中(우중)이었다. 멋진 봄밤의 신나는 놀이였다.)

[출처]<a href='http://www.hohodang.com/?bbs/view.php?id=free_style&amp;no=1007' target='_blank'>호호당 블로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