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人(거인)의 傳說(전설), 정주영의 이야기 2012.10.3 펌글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함께 우리 국운이 바야흐로 뻗기 위해 용트림을 할 때 등장한 사람들로서 그냥 여느 기업인과는 격을 달리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이런 인물들은 우리 국운의 장장 360 년에 걸친 큰 흐름에 있어 단 한 번 나타날 수 있는 거인들이다. 다시 말해서 360 년에 한 번 나타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오늘에도 그에 못하지 않은 인재들이 있겠지만 ‘인물은 시대를 만나야 만들어지는 법’이라 그렇다.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이 세 사람 중에서 매력이 풍부한 사람을 꼽아보라 한다면 단연코 정주영일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태어난 날이 庚(경)의 날로서 1940 庚辰(경진)년이 운세 바닥이었다. (그리고 다시 60 년 뒤인 2000 년이 또 한 번의 바닥이었으며 이에 그 1 년 뒤인 2001 년에 세상을 떠났다.)
1915 년생인 정주영은 소학교 졸업 이후 여러 번 가출해서 서울의 부기학원에서 簿記(부기)를 배운 것이 커다란 무기가 되었다. (장사에 있어 회계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던 중 1940 년 그로서는 바닥 운세에 우연히 자동차 정비공장 사업에 뛰어들었다. 운세가 바닥이니 잘 될 까닭이 없었을 것은 당연지사, 공장에 불이 나서 말아먹었고 다시 빚을 내어 시작했지만 일제의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 하는 불운이 겹쳤다.
하지만 해방 이후 주한 미군의 산하기관으로부터 땅을 불하받아 또 다시 자동차 정비공장을 세웠으니 1946 년 4월의 일이었다.
정주영은 이미 그때부터 자동차 사업에 열의를 보였던 것이니 그 열의는 끝내 식어들지 않았다.
그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시작한 1946 년 4월로부터 30 년이 흐른 1976 년 1월 26일 최초의 국산차인 포니가 발매에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 늘 애기하는 말, ‘성공하고자 한다면 30 년간 한 주제를 물고 늘어져라’는 말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1946 년에 시작한 일이 1976 년에 마침내 완성차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1970 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가 완성차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실로 요원한 꿈에 불과했다. 완성차란 일류 기술을 가진 선진공업국들이나 해내는 고난도의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니의 뜻이 조랑말인 것처럼 소형의 경차였다. 국내 시장에선 즉각적으로 점유율 1위를 차지했지만 해외에선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정주영은 기필코 해외수출을 시도했으니 중남미의 후진국인 에콰도르에게 무려(?) 5 대를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982 년 무렵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경련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정주영 회장이 호주에 포니 400 대를 수출하게 되었을 때 기고했던 글이 기억난다.
우리 현대차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지만 우리 현대차가 언젠가는 전 세계 시장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며, 또 언젠가는 지구상 어디를 가도 현대차가 굴러다니는 광경을 목도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고 정 회장은 자신의 각오를 밝히고 있었던 글이다.
당시 400 대 수출은 나름 큰 뉴스거리였다. 그리고 수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생산 원가보다 더 저렴하게 수출한다는 뒷담화도 무성했다. 사실 당시 언론들은 현대차의 수출을 한껏 비웃고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0 년 당시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대학생들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買辦資本(매판자본)’이란 비판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운동권 학생들은 정주영을 찾아가 면전에서 매국노 혹은 매판자본이라고 욕설을 하고 시위를 했다.
잘난 지식인들과 교수님들, 나름 양심적이라 알려진 야당 정치인들까지 합세해서 그런 식으로 정주영을 비판하고 있었던 터라 뭘 모르는 학생들은 물론 나 역시도 정주영을 그런 눈으로 바라볼 때였다.
그런데 전경련에 실린 그의 기고문을 읽어보니 20 대 후반의 세상 물정 모르고 그저 부화뇌동하면서 잘 난 체하던 내 눈에도 뭔가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아, 이 사람은 내가 알던 악덕 기업인이 아니구나, 뭔가 열정이 있는 기업인이자 애국자일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만든 정주영의 글이었다.
현대차가 처음 완성차 포니를 시판한 1976 년 이래 다시 30 년이 흐른 2006 년의 시점에 와서 현대차는 세계 유수의 자동차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 그렇게 해서 비록 정주영은 갔어도 1946 년 자동차 정비업소로 출발한 현대차는 60 년이라는 하나의 週期(주기)를 보냈다.
이제 다시 먼 과거로 돌아가자.
정주영은 1946 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 이래 다시 1947 년에는 건설업인 현대토건을 창립했다.
1940 년이 정주영 회장의 운세 바닥이었으니 1945 년은 그로서는 財運(재운)이 바닥인 ‘재바닥의 운’이었다. 그러니 현대자동차나 현대토건 모두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영세기업에 불과했다.
1950 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부산으로 피난 갔던 그는 서울 수복 후 또 다시 재건에 나섰다.
사실 끊임없는 시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열심히 해서 돈이 좀 생길 만 하면 여지없이 다 털리는 일의 반복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1950 년 현대자동차 공업사와 현대토건을 합쳐서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그런 그에게 행운이 다가온 것은 1940 년 바닥으로부터 18 년이 지난 1958 년의 일이었다.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성공리에 마친 일이 그것이다.
이로서 현대건설의 능력이 널리 인정을 받았고 그로 인해 급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물론 소양강 댐의 건설, 해외건설 진출 등으로 쉴 새 없이 분주한 세월이 이어졌으니 1970 庚戌(경술)년은 정주영에게 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의 운이었다.
이리하여 1970-1980 년대는 실로 눈부신 약진의 세월이었으며 당시 그 중심은 광화문에 있던 현대건설 사옥이었다.
1980 년 일생을 통해 가장 화려한 寒露(한로)의 운을 맞이한 그는 서울 종로구 계동에 새로운 사옥을 짓고 1983 년 가을에 입주했다.
1984 년은 甲子(갑자)년이다. 1980 년이 운세 상 한로였으니 한로 지난 다음의 財運(재운)이었다.
이 대목이 무척 중요하다. 잘 알아두면 누구에게나 큰 지혜가 된다.
누구나 운세가 입춘 바닥으로부터 30 년이 지나면 입추가 되고 그로부터 10 년이 지나면 일생을 통해 가장 화려한 한로의 운이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4 년이 지나면, 즉 바닥으로부터 44-45 년이 지난 무렵이 되면 재운을 맞이한다.
이 무렵이면 반드시 상징적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한 번 있다는 점이다.
보통 사람은 이 무렵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거나 또는 직장에서 기대 이상의 승진을 하게 된다. 장사하는 사람의 경우 멋진 전원주택을 한 채 마련하거나 사업 규모가 큰 경우 사옥을 짓거나 마련하게 된다.
그러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당신의 운세는 바로 거기까지라는 점이다. 이제 더 이상 뻗어갈 일은 없다는 얘기이다.
정주영의 계동 사옥은 15 층이지만 13 층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14 층이다. 정주영은 맨 꼭대기 층에 회장실을 두었다.
정주영은 계동 사옥에 입주한 뒤 ‘이곳이 세계경제를 이끄는 중심지가 돼야 할 것’이라 말했다 하는데 사실 그로서 그의 운은 절정에 올랐고 다음은 서서히 내리막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개 사옥을 짓는 기업인들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집무실을 마련한다. 무엇보다도 내려다보는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맨 위의 층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말해주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더 이상 오를 층, 즉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그로서 이제 남은 것은 서서히 내려가느냐 아니면 급락하느냐만 남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바로 ‘끝까지 하늘로 오른 용은 후회되는 일만 남았다는 것’, 이른바 周易(주역)에 나오는 저 유명한 亢龍有悔(항룡유회)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니 정주영 회장이 1983 년 말 계동 사옥의 집무실에 들어서던 바로 그 순간 그의 지칠 줄 모르던 運氣(운기)는 이제 한 고비를 넘어 내리막으로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부부가 합심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은다. 처음에는 전세였지만 나중에는 대출을 끼고 자가 주택을 마련하고 그러다가 또 다시 평수를 늘려다가다 어느 세월에 가면 고급 타워형의 평수 넓은 아파트에 입주했다고 한다면?
그게 바로 그 부부의 운기가 가장 좋은 한로의 때를 지나 재운, 일생을 통해 가장 풍성한 세월을 맞이했다고 판단해도 거의 틀림이 없다.
가장 좋은 순간이 지났다는 것은 그로부터 앞으로는 그보다 못한 때가 이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정말로 묘한 것이 있다.
앞서 정주영 회장이 계동 신사옥에 들어서면서 토해놓은 당찬 포부 ‘이곳이 세계경제를 이끄는 중심지가 돼야 할 것’이란 말처럼 사람은 으레 그 순간부터 더 야심찬 꿈을 꾸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운세는 이제 서서히 내리막을 타는데 본인의 이상과 꿈은 전례 없이 더 커지고 높아지면 어떻게 되는가?
다름 아니라 어떤 龜裂(균열)이 생길 것이다. 그 균열은 처음에는 미세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커다란 轟音(굉음)을 내면서 붕괴하게 된다.
사례를 하나 들어본다. 멀리 갈 것 없이 2012 년 지금의 우리나라가 바로 그렇다.
우리 대한민국의 운세는 2004 년으로서 한로였다. 그리고 2008-2009 년이 한로 지난 뒤의 財運(재운)이었다. 그러니 1960 년대부터 줄기차게 약진해온 대한민국의 성취는 일단 여기까지였던 것이다.
G-20 정상회담과 같은 세계적 행사를 우리가 주최한 것도 그런 일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더 커다란 성취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편적 복지, 경제민주화,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권리, 이제는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등, 알맹이는 없고 虛誕(허탄)한 말들이 금년 대선 정국을 지배하고 있다.
서울 광화문 일대의 으리번쩍한 건물들, 한강변의 고층 아파트들, 잘 가꾸어진 공원들, 전국 어딜 가나 풍요로워 보인다. 분명 몰라보게 멋지게 개변하고 단장한 대한민국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여기까지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으나 운세는 이미 내리막을 타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한때 전 세계를 사들일 것만 같았던 무역대국 일본이 오늘날 어쩌다 저 모양 저 꼴이 났던 것일까?
멀리 이유를 찾을 것 없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지금으로부터 12 년이 지나면 바닥에 도달할 것이고 그로부터 다시 6 년이 지난 2030 년이면 바닥에서 부끄러워하고 힘들어할 것이니 그렇다.
그때가 되면 ‘다이나믹 코리아’는 간 곳이 없겠지만, 또 묘하게도 바로 그 순간부터 진정한 ‘다이나믹 코리아’를 주도할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한 시도 멈추는 법이 없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 우리 국운 360 년 흐름에 있어 두 번째 60 년 흐름을 만나 등장한 巨人(거인)의 이야기를 했지만 2024 년부터 시작되는 국운 제3기를 주도할 인물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열정적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우리 국운이 바닥에 도달하면 또 다시 보란 듯이 우리 곁에 나타날 것이다.
[출처]<a href='http://www.hohodang.com/?bbs/view.php?id=free_style&no=890' target='_blank'>호호당 블로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