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당 김태규님 전언

雨水(우수), 陰(음)에서 陽(양)으로 나오는 경계 2013.2.14

브레드 야드 2013. 2. 14. 21:12

雨水(우수), 陰(음)에서 陽(양)으로 나오는 경계    2013.2.14

이제 나흘만 지나면 雨水(우수)를 맞는다. 우수가 중요한 까닭은 그로부터 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2월 18일은 봄의 첫날인 것이다.

立春(입춘)이란 말 속에 봄 春(춘)이 들어있긴 하지만 이번에도 겪었다시피 입춘의 때는 겨울 추위가 마지막 맹위를 떨칠 때, 봄이라 부르기엔 실로 무색할 따름이다.

한해를 통해 우수 무렵에 공기가 가장 건조하다. 건조한 공기는 기관지염을 유발하니 감기의 주범이다. 감기 바이러스는 이럴 때 위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우수 무렵 비가 내리면 감기 바이러스는 전혀 맥을 못 춘다.

雨水(우수)라는 말 자체가 비 雨(우)와 물 水(수)로 이루어져있다. 이는 우수에 비가 내린다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면 좋다는 의미이다. 첫 봄비가 되는 셈이니 겨울 가뭄을 해소함은 물론 건조한 기관지를 적셔주어 건강에도 대단히 좋은 단비가 된다.

나이 들어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우수에 비가 오면 그로서 한해의 수명을 더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우수의 봄비는 대단히 중요하다.  

젊어서는 겨울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나 호호당도 나이가 드니 겨울이 그만 싫어졌다. 몸과 마음에서 陽氣(양기)가 그만큼 빠져나가고 있기에 陽春(양춘)의 기를 반기게 되었다.

우리 몸은 한해를 통해 늘 같은 생리 리듬과 템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겨울이 시작되면 생리 활동과 순환이 느려지고 저하되다가 우수 무렵에 이르러 가장 저점에 도달한다.

最底点(최저점)에 도달했다는 말은 거꾸로 이제부터 氣(기)의 새로운 상승을 시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雨水(우수)로서 우리는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과정, 즉 蘇生(소생)의 싸이클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한해에 걸친 새 삶을 驅動(구동)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수십 년을 산다고 하는 생각은 맞는 말이지만, 실은 해마다 새로운 삶의 更新(갱신)을 통해 이어가는 것이다.

冬至(동지)에 이르러 빛이 죽었다가 살아나고 大寒(대한)에 이르러 에너지가 죽었다가 살아나고 雨水(우수)에 이르러 삶의 약동이 멈추었다가 다시 꿈틀대며 움직이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이처럼 헌 삶의 마침과 또 다른 새 삶의 시작은 모든 종교적 신비로움의 本質(본질)이자 精髓(정수)라 하겠다.

크리스마스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라 하지만 실은 冬至(동지)로서 햇빛의 光明(광명)이 다시 살아난다는 고대 북구의 종교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더하여 기독교의 유월절이나 오순절, 부활절 등은 모두 태양빛의 순환에서 기인하여 땅위의 모든 순환에 대한 고대 유대인들의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석가 탄신일 역시 태양빛의 순환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실은 모든 인류의 종교적 儀式(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  

태양빛의 순환, 즉 榮枯盛衰(영고성쇠)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바로 地上(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갖는 순환이 그것에 직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運命(운명)이라 부르는 것, 사람들이 그 존재에 대해 긴가민가 아리송하게 여기는 것 역시 그 본질은 생명체의 리듬과 그 運氣(운기)의 순환을 일컫는 것이고, 그 순환의 근원은 태양빛의 순환에서 기인한다.

우수는 동지로부터 점차적으로 해가 길어져가는 182.5 일간의 旅程(여정)에 있어 그 1/3에 위치한다. 그렇기에 이미 햇빛은 많이 길어져있다.

그러나 태양빛이 땅을 내리쪼이면 그로부터 한 달 뒤가 되어야 데워진 땅이 熱氣(열기)를 내뿜기 시작하기에 氣溫(기온)은 동지로부터 한 달 뒤까지는 해가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더욱 식어만 가다가 1월 20일 경의 大寒(대한)이 되어야만 비로소 오르기 시작한다.

우수는 땅이 가장 차갑게 식는 시점, 반대로 그로부터 다시 땅이 데워지기 시작하는 大寒(대한)으로부터 한 달 거리에 위치한다.

이에 우수에 이르러 그간 땅속에서 얼어있던 수분 혹은 습기들이 드디어 大氣(대기) 중으로 증발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우수로서 봄날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지랑이란 다름이 아니라 땅에서 대기 중으로 습기가 오르는 현상이다.

봄날 들판에 감실대는 아지랑이는 양력 3월이 되어야 현저해지지만 실은 우수부터 우리 눈에 보이질 않을 정도로 아주 미미하게 시작된다.

아지랑이가 시작된다는 것은 우리 생명체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深奧(심오)한 의미가 있다.

이제 땅속을 우리의 ‘무의식 세계’ 또는 깊은 정신세계라고 하고 땅 표면의 대기를 우리의 ‘의식세계’라고 하자. (이것은 사실 비유가 아니다.)

무의식의 본질은 昏冥(혼명)이고 나아가서 죽음 혹은 假死(가사)의 상태이기도 하다. 반대로 의식의 본질은 認知(인지)이니 그 자체로서 밝음이고 생명이다.

그렇게 본다면 雨水(우수)는 혼명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경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수로서 저 들밖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는 것은 곧 우리의 땅속 무의식 세계에는 존재하고 있었으되 우리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던 어떤 것들이 이제 우리가 인지하는 의식세계 속으로 들어오고 表明(표명)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수의 아지랑이가 아주 미미해서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다가 한 달이 지난 3월 20일경의 춘분이 되어야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오듯, 우수로부터 구체화되고 표명화되는 우리 무의식 세계 속의 그 어떤 것들도 처음에는 잘 감지되지 않다가 춘분이 되어야만 또렷이 감지된다.

(이처럼 자연의 움직임과 생명체의 움직임은 연동되어 있다. 자연과 생명, 그리고 우리는 하나이기에 그렇다.)

사람은 자신의 속을 스스로도 알지 못할 때가 많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알지 못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보통이다.

표면의 내가 있고 그 표면 밑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실로 무수한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참고로 약간 더 얘기하면 이런 현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불교의 한 갈래로서 유식불교 혹은 唯識說(유식설)이라는 것이 있다.

유식설에 의하면 識(식)이라는 것은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작용을 말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識(식)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 현현(顯現)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 유식설의 주장이다.

그런데 우리의 識(식)에는 여러 층차가 있는바, 그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식을 ‘아뢰야식’ 혹은 ‘근본식’이라 하며, 그 위에 나라는 하나의 개체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말나식’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아뢰야식과 말나식은 우리의 깊은 의식 세계이기에 우리 스스로는 그것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深層(심층) 의식인 셈이다.

그리고 비로소 그 위에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지는 여러 의식들, 눈과 귀, 코, 혀, 몸 전체와 대뇌 작용을 통해 얻는 의식, 이른바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가지 표층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불교의 유식설이 우리 마음과 의식의 정확한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지 그 여부는 이 글에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의식 세계는 표면화된 의식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은 구석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심층의식이 표층의 의식 세계보다 훨씬 방대하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마치 빙산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큰 것과 같다 하리라.

이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심층과 우리가 인지하는 표층의 의식은 상호 왕래하고 있다.

그런데 무의식에서 의식 세계로 들어오는 경계가 바로 雨水(우수)라고 나는 여기고 있다. 반대로 의식 세계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 속으로 침잠하기 시작하는 경계를 양력 8월 20일 경의 處暑(처서)이고 그렇다.

雨水(우수)로서 음에서 양으로, 處暑(처서)로서 양에서 음으로 갈마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의식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 앞서 얘기했듯이 세상 모든 것은 一體(일체)이기 때문이다.

흔히 ‘진정한 나를 찾아서 떠난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뭐냐, 밥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뭣이라? 진정한 너를 찾아 떠난다고라? 하며 그저 사치한 마음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나를 찾는 작업’은 단순히 사치한 마음의 발로만은 아니다, 그 또한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다.

진정한 나를 찾아 나선다는 말의 실체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내 속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런 때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나이와도 상관이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의 운명 순환에 있어 小雪(소설)이 되면 누구나 진정한 나를 찾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小雪(소설)인가? 이는 운명 순환의 處暑(처서)로부터 우리의 의식 세계가 양에서 음으로 전환되기 시작해서 30 년간 이어져서 우수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15 년이 흐른 그 중간에 있는 소설이 되면 더욱 본격적으로 내면의 세계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운명 순환에서 우수가 되면 드디어 또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에 양력 5월의 小滿(소만)이 되면 우리 속에 깃들었던 많은 것들이 대명천지로 發散(발산)되기 시작한다.

한해를 두고 말하면 우수로부터 소만까지 3개월이지만, 60 년의 운명 순환에서 보면 15 년의 시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운명의 순환 주기에 있어 小滿(소만)의 때가 되면 그 사람의 매력 혹은 잠재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서서히 운세가 좋아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雨水(우수)는 우리의 심층 의식이 밖으로 표면화되는 때이자, 천지만물이 꿈틀대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때이다.

처음 움직이는 때이니 그게 쉽게 될 리가 없다. 안 쓰던 근육을 모처럼 쓰면 힘들고 피곤하듯, 우수로서 겨우내 잠들어 있던 우리 속의 어떤 것들이 처음 구체화되는 까닭으로 힘들고 피곤한 것은 당연한 법이다.

이에 우수로서 春困症(춘곤증)이 시작되지만 그것을 확실하게 감지하는 것 역시 한 달이 지난 3월의 춘분 무렵이 되는 것이다.

정신세계와 물질세계가 다른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 구분되는 개체들이 아니다. 천지는 그저 하나로서 움직여갈 뿐이다.

그렇기에 봄의 첫날인 우수는 한해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우리 삶의 전체 국면을 통해서도 그 의의는 자못 크다 하리라.

비록 이렇게 글을 통해 적지 않은 것들을 얘기하고 있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글에 담긴 뜻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일단은 이런 것이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이시면 되리라.
 
이제 겨울의 날들이 며칠 남지 않았다.

영어로 2월을 February 라고 한다. 그 말의 유래는 ‘淨化(정화)’라고 하는데 거창하게 여길 것 하나 없다, 2월은 겨우내 묵은 것들을 청소하는 달이라 보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우수를 맞이하며 컴퓨터 교체 작업을 마쳤고, 수년간 쌓인 작업실 내의 이런저런 요상한 퇴적물들을 대거 정리하고 청소해가고 있다.

우수로서 새봄이니 묵은 날들을 청소함은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분도 주말을 이용하여 집안 대청소를 하면 정신이 한결 개운해질 것이다.

겨울 동안 다소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얘기들을 많이 했는데, 이제 봄을 맞아 좀 더 구체적인 얘기들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음에서 양으로의 전환이라 하겠다.
[출처]<a href='http://www.hohodang.com/?bbs/view.php?id=free_style&amp;no=956' target='_blank'>호호당 블로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