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당 김태규님 전언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두에게 평화를 안겨준 亂世(난세)의 무장

브레드 야드 2012. 7. 12. 01:15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두에게 평화를 안겨준 亂世(난세)의 무장    2012.7.6

비 구경 한 번 잘하고 있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오랜 습관으로 해서 새벽녘까지 잠자리에 누운 채 굵어지고 가늘어지고를 반복하는 빗줄기 소리에 취해 있다가 어느 틈엔가 잠들고 말았나 보다.

잠자리에 들기 전 텔레비전에서 일본의 역사탐방 프로그램을 보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東軍(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西軍(서군)이 천하를 놓고 겨룬 ‘세키가하라 전투’의 遺蹟(유적)들을 현지 안내인을 따라 둘러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진을 쳤던 곳, 도쿠가와가 진을 쳤던 곳이며 여타 무장들의 진터, 전투가 시작된 장소와 마지막 결전이 벌어졌던 곳 등등 모든 장소마다 碑(비)가 있고 亡者(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한 탑들이 세워져 있었다.

도쿠가와의 일대기를 풀어나가는 ‘大望(대망)’이란 장편대하소설을 젊은 시절 熱讀(열독)했기에 무척 흥미롭게 시청했다.

참 부러웠다. 일본사람들은 어쩌면 저다지도 과거의 기록과 유적을 잘 보관하고 보존할 수 있었는지 실로 부러웠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었던 때는 1600 년이었으니 4 백년도 더 되었는데 당시의 모든 상황이 깔끔하게 기록되고 보존되고 있으니 말이다.

하기야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과 日誌(일지)들 역시 너무나 철저히 보존되어 있어 임진왜란 戰史(전사)를 연구하는 국내 학자들도 그 기록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낼 정도라 들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한자로는 德川家康(덕천가강), 실로 흥미로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역사에서 忍耐(인내)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고 국내에도 책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생전 일들을 알아보고픈 호기심이 생겼다.

만세력을 통해 알아보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양력으로 1543 년 1월 31일에 태어났다.

干支(간지)로 변환해보니 壬寅(임인)년 癸丑(계축)월 壬辰(임진)일이 된다.

면밀히 살펴보니 1572 壬申(임신)년이 立春(입춘) 바닥이었고, 1602 壬寅(임인)년이 立秋(입추) 즉 운기의 절정이고 따라서 1612 壬子(임자)년이 가장 모습이 화려한 寒露(한로)가 된다.  

그러니 29 세 무렵이 바닥이고 59 세가 기의 절정이며 69 세가 모습이 가장 화려한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도쿠가와의 운세는 29 세인 1572 년으로부터 10 년 동안이 逆境(역경)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바닥에서 10 년간은 죽었다 다시 蘇生(소생)하는 기간이니 가장 어려운 세월이 된다. 문자 그대로 ‘죽었다 깨어나는 기간’인 것이다.

이에 위키피디어에 들어가 살펴보았다. (만세력과 위키피디아, 이 두 가지는 나의 보물이다.)

소설 大望(대망)의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의 필력이 너무나도 탁월하다보니, 소설만 읽어서는 주인공 도쿠가와를 지나치게 美化(미화)한 것 또 과장한 것이 당연히 많을 것이니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고 핵심을 짚어내기란 대단히 어렵다.

아마도 사건의 맥락과 본질을 알아내는 데 있어 가장 정확한 것은 내가 쓰는 방법, 60 년 순환을 통한 운명의 추이를 분석하는 이 방법을 넘어서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자부한다.

아무튼 1572 년부터 10 년간의 세월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어떤 어려움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었던 가를.

당시 오다 노부나가에게 臣從(신종)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大敗(대패)한 전투가 있었다. ‘미카다가하라 전투’에서 지략의 명장 ‘다케다 신겐’의 군대에게 아주 박살이 났던 것이다. 도쿠가와 일생을 통해 가장 크게 혼줄이 났던 전투였다.

거의 죽을 뻔 했고 말위에서 너무 놀라서 똥을 싸는 줄도 몰랐다는 전투였다.  

그리고 1579 년에는 비록 동맹관계였지만 사실상의 주군이던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엄청난 굴욕을 겪어야 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도쿠가와의 맏아들과 그 모친에게 自決(자결), 즉 자살을 명했던 것이다.

아들과 그 모친을 자결케 하라는 명령에 도쿠가와의 부하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지더라도 한판 벌리고 죽자는 강경파와 어쩔 수 없으니 순종하자는 파로 나뉘어 격론을 펼쳤다.

하지만 도쿠가와는 눈 딱 감고 맏아들과 함께 그 모친이자 자신의 부인인 사람에게 자결에 응하도록 지시했다.

1579 년은 己卯(기묘)년이었고, 도쿠가와의 운세 바닥으로부터 7 년째였으니 가장 고통이 심하고 굴욕적인 한해였던 것이다. (누구나 이 무렵에는 굴욕을 맛본다.)

당시 36 세의 혈기왕성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굴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한 그는 이를 갈면서도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따랐다.

맏아들과 부인을 죽여서라도 家門(가문)과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위해 엄청난 아픔을 감수하고 또 인내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진면목이라 하겠다.

그가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을 남긴 것은 결코 헛말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겠다.

도쿠가와의 인생을 살펴보니 그 역시 戰國時代(전국시대)의 武將(무장)이니 전쟁에도 뛰어났지만 그보다는 역시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훨씬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일이든 참고 인내하면서 목적을 달성해가는 지독한 사람이 도쿠가와였다.

그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졸지에 변을 당해 죽은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상이 되었을 때도 도쿠가와는 인내하고 때를 기다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한때 전쟁을 치르고 실질적으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대세에 밀려 자신의 둘째 아들을 도요도미에게 養子(양자)라는 명목의 인질로 내어주면서 강화를 했고 또 굴종을 했다.

이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꾸준히 경계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를 통일하자 난데없이 도쿠가와의 근거지를 전혀 엉뚱한 에도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멸망의 길을 간다는 것을 인정한 도쿠가와는 또 다시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옮겨간 에도, 즉 江戶(강호)는 그 바람에 오늘날의 일본 수도인 도쿄, 즉 東京(동경)이 되었다.

1590 년의 일이었다. 이는 轉禍爲福(전화위복)이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운세 상 1572 년이 바닥이었으니 1590 년은 18 년이 흐른 시점으로서 운세 상 小滿(소만)이 된다.

늘 말하듯이 사람의 운세는 바닥 18 년 뒤인 小滿(소만)으로부터 뻗어간다. 운명의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도쿠가와가 47 세 되던 시점이었다.

그간 무수한 전쟁과 전투를 치르면서 용케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능력과 용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인내하고 참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도로 입성할 때 도쿠가와는 불안에 떠는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부하들에게 예복을 차려입도록 했다. 또 입성 이후 닷새 만에 모든 백성에게 쌀을 무상 배급했다.

그리고 자신의 핵심참모들에게 녹봉을 나누어주는 한편 현지의 토착 세력들에게도 신분을 보장하고 무리한 압력을 행사하거나 땅을 몰수하는 일도 없었으며 옛 다이묘의 유신들에게도 지방관직을 주어 불만을 무마했다.

신임 다이묘 도쿠가와의 관대한 정책은 다른 지역과 산으로 격리된 간토 지역의 특성과 맞물려서 생산은 급격히 늘어났고 인심도 안정되었다. 이에 도쿠가와는 빠른 시간 안에 더욱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훗날 사람들은 ‘도쿠가와는 물러남으로써 오히려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592 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슨 망상을 품었는지 돌연히 우리 조선을 침략했고 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598 년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여 도쿠가와는 인심을 얻었고 특히 도요토미에게 복종하고는 있었지만 내심 反感(반감)이 많았던 여러 무장들과 다이묘들의 마음을 샀다.

그리하여 1600 년 도요토미의 심복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와 세키가하라에서 자웅을 겨루는 한판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사실상 권좌에 올랐다.

세키가하라의 전투 역시 군사간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진영에 포함된 여러 무장들과 사전 내통한 것이 결정적인 승인이었다. 그만큼 도쿠가와는 정치에 능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도쿠가와는 운기의 입추인 1602 년을 맞이했고 그 다음해인 1603 년에 가서 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 즉 이른바 ‘쇼군’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이후 조선과도 국교를 수복하였고 나아가서 그가 창건한 에도 막부 체제는 1867 년 메이지 유신으로 사라질 때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2 년이 운세 상 한로였으니 그의 노년은 威光(위광)으로 가득했다. 그러다가 입동 직전인 1616 년 73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인내를 통해 천하를 통일하고 평화를 가져다 준 거인의 죽음이었다.

오늘의 얘기에서 알 수 있듯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9 세 때가 바닥이었고 그로부터 10 년간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마침내 최후의 승자가 되어 일본백성들에게 평화를 안겨주었다.  

지금 세상은 청년 백수 시대가 왔다. 나 호호당이 운명을 안다고 하니 길을 물어오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오늘의 글은 그들을 생각하며 썼다. 뜻을 잃지 말고 힘든 시기에는 인내하고 견디다 보면 마침내 훗날의 영광이 있을 것이니 바로 도쿠가와의 이야기가 좋은 예라 하겠다.

 

[출처]<a href='http://www.hohodang.com/?bbs/view.php?id=free_style&amp;no=841' target='_blank'>호호당 블로그</a>